미국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있을 때 어렵게 지내던 날들이새록 새록 생각이 난다.

미국에 살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에 있을 때 어렵게 지내던 날들이새록 새록 생각이 난다.

갈수록 습관화 되어가는 생활의 안이함 때문에 더욱 고생스럽던 날들이 생각나는 모양이다. 매일
자동차를 이용하고 운동이 부족하므로 시간을 쪼개어 짐에가서 운동을 하는 것이 이곳 의
생활이다.
내가 결혼하여 신혼살림을 차린 장소가 안암동에 있는 대광 아파트이다. 이는 언덕 위에 있는
7층짜리 건물 여러동으로 구성된 단지인데 엘리베이타 없이계단을 이용하여 오르내리는 곳이다.
보통은 엘리베이타가 없으면 5층이 최고 높이인데 7층까지 있는 것을 보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
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단지 내에서 제일 뒤 쪽 높은 언덕 위에있는 동, 그곳의701호가 나의
보금자리였다. 언덕을 오르면서, 계단을 하나, 둘 밟고 7층까지 올라가면서한번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결혼하여 처음부터 독립된 나의 공간을 갖을수 있음에감사했다. 나는 그
당시,중구 보건소 치과에근무하고 있었는데 집에서부터 직장까지 출근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아서
행복했다.
퇴근을 하면서 중부시장을 가로질러 을지로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갈 때, 펼쳐진 노점에서 저녁
반찬거리를 샀다. 그리고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을 지나 내려서 집까지 걸어가는 것이다.
하루는 몇가지 아채와 과일을 사서 들고 가다보니 너무나 무거웠다. 언덕을 오르며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조금만 더”라고 되새기며 참고 걸었다. 정말로 손에 들고 있는 시장본 비닐 봉지들을
내려놓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싸게 살려고 비교하고 재어보고
노력했는데 무겁다고 해서 내어 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참고 참아서 꼭대기 아파트 7층까지
올라가곤 하였다. 그때의 팔이 떨어질 것같은 그 무거움은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나는 살아오면서 “조금만 더”하면서 참았던 때가 많았다.
내가 어릴 때 자란 곳은 대전이다. 1960 년 대에만해도 대중 목욕탕이 흔치않았고 입장료가 무척
비쌌다. 물론 집에서 더운 물로 목욕한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서 경제적이고 손쉬운
방법으로서 겨울에는 버스를 타고 유성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오는 것이 집안의 큰 행사이었다.
3남 4녀를 둔 불쌍한 우리 엄마는 어린 우리를 데려가서 모두 머리 감기고 때를 밀어주시곤 했다.
그리고 나면엄마는 실내의 그 뜨거운 공기에 지쳐서 막상 자신은 깨끗이 닦지도 못하고 그냥
오시곤 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 말을 잘 듣는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고 엄마가 한 번 말하면
뜨거운 온천물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조금만 더” 라고 속으로 말하며 하나부터 백까지
세고 또 세었다. 어린 것이 살이 익겠다라고 옆에서 때밀던 아줌마가 말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엄마가 그만 됐다 나오거라 하실 때가지 참았다.
내가 아이를 낳으려 병원에 갔을 때마다 그 생명이 세상에 나올 때가지 참아야 했던 그 아픔의
순간들, “조금만 더”를 되풀이하고 되풀이하여야만 했다. 아이들이 자랄 때 터울이 없는 네명을
한꺼번에 돌보는 것이 너무나 벅찼다. 팔은 두개인데 아이는 네명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금만
더 참자. 세월아 빨리 지나거라”라고 되뇌이곤 했다.
마라톤을 참여할 때마다 그만 포기하자라는 유혹에 맞서서 “조금만 더” 그래 너는 할 수 있어 마음
속으로 스스로를 다독거리며 결승점까지 뛰곤 하였다. 죤 뮤어 트레일에서 일 만 휘트가 넘는 열

개의 고개를 넘을 때마다 “조금만 더” 참고 가자. 이제 정상에 올라가면 곧 내려가게 될거야 하고
계속하니 저절로 완주를 하게 되었다.
이제 어려웠던 한 해 2010년을 마감하며 새해 2011년을 맞이한다.
오늘 나에게 이메일을 주신 한 분은 ‘모두에게 힘들었던 한해도 내리는 빗물을 타고 마지막 뒷모습을
보이며 지나가고 있습니다.’라고 표현을 했다. 이 어려움이 지난 폭우와 함께 모두깨끗이 씻겨내려가고
밝고 희망찬 새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현실은
그렇게 쉽게 탈바꿈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나는 지난 한 해동안 살면서 했던 무던한 노력을 새해에도 “조금만 더” 하려고 한다. 엄마가 한 말처럼
그만 됐다라는 그 순간이 올 때까지 “조금만 더” 되풀이 하련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라고 말한 시인의 마음을 가지고…

김 장 숙 <시네마 덴탈케어 원장> Tel. (661) 253-3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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